신청하기 →
← 에세이 전체 목록
DEATH LITERACY · ESSAY

휴먼엣지가 죽음문해력을 만났을 때

매년 이맘때면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책이 있다. 이제는 한국의 소비예측을 넘어, 한 해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로 자리 잡은 『트렌드 코리아』다. 나는 이 책의 새 표지를 보면 ‘아, 이제 올해를 슬슬 정리하고 내년을 준비해야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트렌드 코리아 2027』 책 표지
『트렌드 코리아 2027』(김난도 외, 미래의창)

『트렌드 코리아 2027』에서 단연 내 눈길을 끈 키워드는 ‘휴먼엣지’였다. AI가 만들어낸 결과물에 인간의 경험과 전문성, 신뢰가 어떤 가치를 더할 수 있는지 묻는 말이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인간이 직접 겪고 판단하며 살아온 시간이 중요해진다는 이야기로 읽혔다.

우리는 경험의 가치를 말할 때 대개 일과 성취를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해봤는지, 어디에 가봤는지, 무엇을 이뤘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누군가를 돌보고, 죽음을 가까이에서 마주하고, 남겨진 사람의 곁을 지켰던 시간에도 다른 사람에게 전할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을까. 나는 ‘휴먼엣지’라는 질문을 우리가 살아오며 겪은 죽음의 경험으로 가져와 보고 싶다.

죽음의 경험이 꼭 가까운 가족과의 사별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아픈 부모님과 병원을 오가던 시간, 친구의 장례를 도왔던 일, 가족을 잃은 동료에게 어떻게 말을 건넬지 고민했던 순간, 우리집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거나 아끼던 화분이 죽는 일도 죽음의 경험이다.

부모님에게 원하는 장례 방식을 처음 물어본 일이나, 내게 갑작스러운 일이 생기면 누구에게 연락해야 할지 적어본 경험도 있다. 3040의 일상에도 이런 순간은 조금씩 들어와 있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예상하지 못한 어려움을 만난다. 병원에서는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장례식장에서는 처음 듣는 말들 앞에 멈춰 선다. 위로하고 싶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연락을 미루기도 한다. 한 번 겪고 나서야 ‘이건 미리 알았으면 좋았겠다’, ‘그때 누가 이렇게 도와줬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남는다.

바로 그 안에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앎이 있다. 병원에 가기 전 질문을 적어두는 요령, 가족과 미리 의논해 두면 좋을 일, 장례가 끝난 뒤에도 이어지는 도움이 있다. 안내문에 적힌 절차와 함께, 그 상황을 지나온 사람이 전해줄 수 있는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한 이유다.

죽음문해력은 죽음과 임종, 사별의 상황을 이해하고, 필요한 도움을 찾으며,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행동할 수 있는 지식과 능력이다. 죽음문해력 연구에서도 경험을 통한 배움과 사회적 실천을 중요하게 다룬다.

영국에서 성인 2,106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는 개인·가족 차원에서 죽음과 임종을 접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그러한 경험이 없는 사람들보다 높은 죽음이해도를 보였다. 물론, (아직 진행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거라 생각한다.

나는 경험이 배움으로 이어지는 과정에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정신없이 지나온 일을 누군가에게 설명하다 보면 무엇이 어려웠고, 어떤 도움이 있었으며, 무엇을 다르게 하고 싶었는지 조금씩 드러난다. 듣는 사람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상황을 상상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하게 된다.

“장례가 끝난 다음 주에 누가 같이 밥을 먹어줬으면 좋겠더라.”

이 짧은 말은 누군가의 행동을 바꿀 수 있다. 조문을 다녀온 뒤에도 연락을 이어가고, 도움이 필요하면 말하라는 인사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함께 식사할 날짜를 물어보게 한다.

“병원에 가면 긴장해서 궁금했던 걸 다 잊어버리더라. 적어가는 게 도움이 됐어.”

이런 이야기는 부모님과 병원에 갈 친구에게 당장 쓸 수 있는 준비가 된다. 한 사람의 경험이 다른 사람의 질문과 행동을 바꾸고, 그것이 다시 누군가를 돌보는 힘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물론 내 경험이 모두에게 맞는 정답일 수는 없다. 사람마다 관계와 상황이 다르고, 같은 도움도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해야 해”보다 “나는 이럴 때 도움이 됐어”라고 말하면 좋겠다. 서로의 차이를 남겨둔 채 경험을 나눌 때, 우리는 더 많은 선택지를 갖게 된다.

이야기를 꺼내는 일만큼 들을 수 있는 분위기도 중요하다. 누군가 세상을 떠난 가족을 이야기할 때 조금 더 머물러 듣는 것, 돌봄이 힘들었다는 말에 곧바로 평가나 조언을 보태기보다 무엇이 가장 어려웠는지 묻는 것. 친구와 밥을 먹다가도, 동료와 커피를 마시다가도 이런 대화는 시작될 수 있다.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특별한 자리에서만 해야 할 이유는 없다.

말할 시점과 범위는 각자가 정할 수 있어야 한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경험도 있고, 오래도록 말하고 싶지 않은 기억도 있다. 경험을 나누는 사회에는 기꺼이 들어주는 사람과 함께 기다려주는 사람도 필요하다. 슬픔을 반드시 교훈이나 성장으로 바꿔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야기하고 싶어졌을 때 편안하게 꺼낼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

AI는 이 과정에서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다. 복잡한 정보를 정리하고, 병원에서 할 질문을 제안하고, 위로의 문장을 함께 고민할 수 있다. 하지만 병실에서 가족의 손을 잡고 망설였던 시간이나, 친구의 부고를 받고 한참 휴대전화를 바라보던 순간을 자신의 삶으로 겪지는 않는다. 장례가 끝난 뒤에도 친구에게 연락하고, 답이 없어도 다시 안부를 묻기로 하는 선택은 실제 관계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우리가 가진 경험의 가치는 거기에 있다. 완벽한 답을 제시해서가 아니라,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의 곁에 설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시행착오를 건네 다음 사람이 조금 덜 막막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것이다.

죽음문해력이 높은 사회는 이렇게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사람, 다른 사람의 경험을 귀담아듣는 사람, 그 이야기를 기억했다가 필요한 순간에 행동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다.

살아오며 겪은 죽음의 경험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기억일 것이다. 그 기억을 나눌 준비가 되었을 때, 우리가 알게 된 것들이 다음 사람에게 가닿으면 좋겠다. 나의 경험이 누군가의 질문이 되고, 그 질문이 또 다른 사람을 위한 돌봄으로 이어지도록.

죽음문해력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휴먼엣지의 시대가 반가운 이유다.

김영아
죽음문해력커넥트 · 다다르다 대표
죽음문해력커넥트

죽음문해력커넥트는 아산 프론티어 아카데미(AFA) 15기의 프로젝트팀으로, 비영리재단·기업재단·재단법인·직업사관학교·소셜벤처 등에서 일하는 6명이 모여 "죽음을 이해하고 준비할 수 있도록, 정보를 연결한다"는 방향으로 활동합니다. 한국형 죽음문해력 지수(DLI/K) 개발, 3040 죽음문해력 아카데미, 유언장 쓰기 클래스, 죽음문해력 축제 「데스티벌」 등을 운영하며 죽음을 일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듭니다.